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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낙동정맥 트레일서 물이 옷 벗는 소릴 듣다"

-서면 전곡~온정 조금마을 원수목재 44Km 처녀림의 속살-
김병화 기자 / kbh1199@hanmail.net입력 : 2015년 01월 31일
↑↑ 낙동정맹 트레일 울진구간 첫 길인 골포천
ⓒ CBN 뉴스
[김병화 기자]= 낙동정맥이 배태한 경북 울진군 서면 전곡리 송리재 골포천에 서면 ‘물이 옷 벗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물이 옷 벗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영남의 삶과 문화를 잉태한 태백산맥과 낙동강이 어울려 영남 700리를 적시며 낙동정맥은 아마득한 옛적부터 지금까지 또 셀 수 없는 앞날까지 사람살이를 보듬고 모둠살이를 만든다.

강(江)과 내(川)는 필연적으로 길을 만든다.
길은 길로 이어져 삶의 곡절을 껴안아 기필코 마을로 닿는다.
낙동정맥 트레일은 영남사람들의 핏줄이다.
낙동정맥 트레일 울진 구간의 시작은 봉화군에 속한 산중의 역사(驛舍) 승부역 건너편 송이재(松利峴)로 이어지는 ‘벼리길’부터 시작한다.
송이재는 낙동강의 지류 골포천이 만든 고개마루다.
‘눈꽃축제와 백두대간 협곡열차’로 이름난 승부역은 울진사람들에게는 아쉬운 기억의 현장이다.

본디 승부역은 울진의 소유였다.
지난 1956년 강원도 울진군 서면 전곡리에서 영암선 개통에 따라 보통역으로 산중사람들의 애환과 삶을 실어 날랐다.
지난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울진군 서면 전곡리에서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로 편입됐다.

2013년 2월 21일에 승부역사 앞에 있는 영암선 개통 기념비가 등록문화재 제 540호로 지정되고 같은 해 4월 12일에 중부내륙순환열차와 백두대간협곡열차가 운행을 개시했다.
영암선 개통 기념비석은 여느 비석과는 다른 곡절을 품고 있다.
철로를 개설하면서 소중한 목숨을 버린 노동자들의 넋이 오롯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영암선은 한국의 개발시대 동력원이던 석탄을 수송하기 위해 강원도 철암과 경북 영주를 잇는 87Km의 산업철도이다.

행정구역은 봉화군으로 편입됐지만 승부역에는 여전히 울진 전곡리와 원곡리 사람들이 켜켜이 쌓은 삶의 족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낙동정맥이 이룬 협곡과 강은 철로 개설의 난관이었다. 그렇다고 오늘처럼 마구잡이로 자연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영암선은 이 때문에 터널 33개소, 교량 55개소를 품고 있다.
40여년 전 이곳 승부역에서 근무하던 직원이 지었다는 ‘하늘도 세평이요/꽃밭도 세 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는 시비를 가슴에 담고 자갈과 흙이 서로 섞인 강둑길을 따라 왼편으로 물길을 건너 들어서면 비로소 낙동정맥 트레일 울진구간 첫 길인 ‘금강송숲길’ 로 들어서는 초입이다.
주변의 지세가 예사롭지 않다.
하늘을 받치고 있는 금강소나무의 위용이 그렇고 물살이 휘감고 도는 아마득한 절벽이 그렇다.
↑↑ 낙동정맥 트레일 울진구간 첫 번째 길인 금강송숲길의 첫 마을인 서면 전내마을에서 넓재로 이어지는 낙엽송 길
ⓒ CBN 뉴스

◆ 낙동강 벼리길서 만나는 산판쟁이의 삶...금강송숲길
절벽 낮은 자리에 뱀허물처럼 가느다란 길이 흐릿하다.
조도잔(鳥道棧)이다. 조도잔은 벼랑과 벼랑을 잇는 구름사다리를 뜻한다.
울진사람들은 이를 ‘벼리길’이라 부른다.
골포천이 배태한 산중마을 전곡리 전내마을 사람들은 숱한 삶의 곡절을 이고 지고 골포천이 빚은 송이재 벼리길을 넘나들었다.

이 벼리길만이 승부역을 거쳐 대처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승부역에서 벼리길을 지나 전내마을까지는 7.7Km, 20리에 조금 못 미치는 거리이다.
전내(前川)마을은 평생 금강소나무와 함께 살아왔다.
한 뼘의 땅뙈기조차 내 것으로 갖지 못했던 사람들은 식솔들을 데리고 산중으로 들어왔다.
바람좋은 날을 잡아 산비탈에 불을 들였다. 화전을 일궜다.
메밀과 수수와 조를 가꿨다. 그러다가 금강송이 이들 화전민들의 삶을 바꾸었다.
조선왕조 궁궐을 올리기 위한 나무로 금강소나무를 실어내면서 전내마을은 ‘산판마을’로 모습을 바꿨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황장목(黃腸木)으로 불리며 울진을 지키고 울진을 가꾼 금강송은 조선조 궁궐 대들보에서 일제강점기 수탈의 자원으로 마구잡이로 베어졌다.
전내마을에서 베어진 금강송은 목두쟁이들에 의해 골포천을 지나 낙동을 건너 서울로, 경향각지로 건너갔다.
금강송의 이명(異名)으로 붙박힌 ‘춘양목’도 이렇게 붙여졌다.
↑↑ 낙동정맥 트레일 울진구간 첫 번째 길인 금강 송숲길 골포천 변에서 팔등신의 선남선녀를 닮은 금강송 연리지(連理枝)가 똬리를
ⓒ CBN 뉴스
전내마을로 이어지는 벼리길이 끝나는 지점에 잘생긴 금강송 연리지(連理枝)한 쌍이 사람의 발길을 멈춘다.
여느 연리지처럼 그저 손이나 잡고 있는 밋밋한 형국이 아니다.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매끈한 팔등신 금강송이 온 수족과 몸뚱아리를 똬리처럼 틀고 부비며 하늘을 받치고 있다.
오래 헤어졌다 만난 연인처럼 사랑의 몸짓이 치열하다. 사랑의 정점이다. 바라보면 괜스레 가슴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진다.
금강송 연리지 아래서 그런 사랑을 꿈꾸듯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낙동정맥 트레일 울진구간 첫 길을 품고 있는 첫 마을인 전내마을은 지금 ‘산촌생태마을’로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다.
전내마을 사람들은 마을 앞 골포천에 산천어를 놓고 무지개송어를 키웠다.
금강송을 휘감고 도는 바람과 볕을 갈무리해 생존의 텃밭으로 변모시켰다.
전내마을에는 현재 8가구가 산다.
불을 놓아 옥토로 바꾼 산밭에는 고랭지 배추를 심고 약초를 가꾼다.
김병화 기자 / kbh1199@hanmail.net입력 : 2015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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